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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적인 것'의 의미를 확장하여 가족과 여성이 수행해 온 무급 돌봄 노동을 포함해야 한다! 돌봄 경제학 분야의 선구자 낸시 폴브레 매사추세츠 대 경제학과 교수의 역작.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극단적 경쟁과 개인주의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지났다. "페어플레이 원칙에 기반한 광범위한 진보 연합 구축에 도움을 줄 이론적 도구" 다양한 이론적 전통, 역사와 현대 생활의 증거로부터 추출한 핵심 통찰을 능숙하게 엮어 가부장제의 부상과, 간절히 바라 마지않는 그 쇠락에 대한 담대하고 탁월한 해설을 제시한다.

    낸시 폴브레 (지은이), 윤자영 (옮긴이), 에디토리얼 (출판)

    돌봄의 사회화를 꿈꾸며

    돌봄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이 많아지고 있음을 책을 통해 느낀다. 실제적으로 피부로 와닿지는 않으나 여러 연구들과 정책들, 주장들을 보며 우리도 머지않은 미래에 돌봄의 사회화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가부장제가 가져온 젠더 불평등으로 돌봄이 여성에게 전가되고 그로 인해 이주민들의 돌봄 노동도 추가로 사회에 진입한다. 저자는 전통적인 여성 돌봄에서 벗어나 돌봄의 영역이 경제적으로 인정받아야 함을 주장한다. 출산율이 전 세계적으로 줄어드는 것에 '국가가 아이를 양육하는 비용을 양육자에게 별로 지원하지 않으면서 그 아이가 내는 세금으로 양육자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혜택을 주고 있기 때문에, 출산율은 대체 수준 이하로 떨어졌고 세대 간 이전의 지속가능성은 위태로워졌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우리나라와의 상황과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건강보험료를 내는 청년이 가족인 분이 아이는 보험료는 많이 내고 병원은 안 간다고 했던 부분이 떠올랐다. 모두 내고 평등하게 분배되는 복지라면 이런 생각을 안 하지 않을까. 최근 읽는 책들에서 돌봄이 많이 거론되니 사회적인 의식의 변화가 필요함을 더욱 느끼게 된다. 보편복지가 실현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점점 멀어져 가는 현실에 암담할 따름이다. 일부 인구 학자들과 정책입안자들이 젠더 평등 수준을 높이는 것이 안정된 인구 수준으로 갈 수 있음을 말하는데 이는 오히려 출산을 하고 돌봄을 하는 여성들이 출산을 미루거나 기피하거나 아이를 적게 낳을수록 어머니는 더 큰 협상력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출산율을 올린다고 한시적으로 출산장려금을 줄 것이 아니라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과 함께 돌봄에 대한 인식개선과 함께 젠더 평등이 이뤄져야 한다. 저자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집단 갈등과 공존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계급 간의 갈등과 젠더 갈등을 교차 정치 경제적 관점으로 모두 맞물려 있음을 다양한 이론들로 설명한다. 또한 서로와 다음 세대를 돌볼 의무가 모두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회진보를 위해 정치와 경제의 재구성이 필요한 이때 우리는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이 던져주는 질문을 경험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돌봄과 연대, 경제학이 외면해 온 경제

    대중에게 친절한 책은 아니다. '교차성'이라는 용어가 별다른 설명 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독자들이 이미 어느 정도 정치경제적 지식이 선행되어 있다는 가정하에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용감한 책이다. 사실 이 시대에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게 별로 용감한 일은 아니다. 무임금 돌봄의 착취 고리에서 탈주하겠다는 선언, 그것은 지난 세대에 용감한 선언이었다. 지금 용감한 선언은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에 서서 '무임승차'의 뻔뻔함을 지적하는 일이다. 무임승차조차 선택할 수 없는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이다. 그들이 옹호하는 사람들이 지식 계급으로나 경제적 계급면에서 아무런 우위도 확보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은 용감한 일이 된다. 이 책은 용감할 뿐만 아니라 영리한 책이다. 저자는 정치적 선언이 경제 이데올로기의 어떤 허점을 파고들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낸시 폴브레에 비교해 낸시 프레이저는 마르크스주의의 견고한 틀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래전에 어느 비혼주의자 여성이 다른 동창생의 아이를 안고 어르며 "훌륭하게 커서 세금 많이 내야 한다."라고 괴이한 덕담을 하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불임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아직 아이를 낳지 않은 상태였으며 언제 낳을지, 과연 낳을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태였지만, 그 말은 상당히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느낌은 있었지만 언어가 없어서 나는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때 느낀 불쾌함의 실체를 논리적 언어로 재구성할 수 있다. 저 덕담을 가장한 압박에는 '무임승차자'의 뻔뻔함이 들어 있다. 자신이 무임승차자라는 인식조차 없이, 타인의 돌봄 노동에 승차하겠다는 지독한 뻔뻔함이 들어 있는 것이다. 전문직종에 종사하며 연금과 보험을 잔뜩 들어둔 비혼주의 여성은 타인의 돌봄 노동에 무임승차하여야만 미래를 보장받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짐짓 모른다. 그가 나중에 자신을 돌봐주는 간병인이나 간호사, 요양보호사 등등의 인력에게서 '염가'로 사들이는 노동은 '사람을 길러내는 일'에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헌신한 타인의 선의에 기대 마련되는 것이다. 이 세계에 젊은이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다면 노인은 대체 누구에게 돌봄을 기대하겠는가? 그것을 단순히 미래 인구에게 '세금'을 많이 내서 내 '연금'을 보장해 달라는 식으로만 해석하는 일은-그러니까 돈으로 모든 것을 환산하는 태도는(물론 그 자체도 매우 뻔뻔하지만) 무임승차자의 이기적 사고의 한계를 보여준다. 나는 여성에게 모든 짐을 당연한 듯이 떠넘기는 지난 세대의 어르신들을 만나면 숨이 막힌다. 그런 윤리관을 문학의 미학으로 여기는 문장들을 만날 때도 숨이 막힌다. 그렇지만 작금의 현실 중에서 여성들이 인류의 미래를 보이콧함으로써 무언가를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볼 때도 슬퍼진다. 그것은 대안이 아니다. 그것은 멸망이다. 협상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 때문에 모두 자멸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낳고 나서 누군가 내게 "행복하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아이를 낳아서 '우리의 행복'은 증가한 것 같아. 그렇지만 '나의 행복'은 줄었어. 많이 행복한 순간도 있지만, 일상이 대체로 '내 행복'을 희생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니까. 그 희생을 주변의 행복이 메우는 느낌이야. 부모님, 남편, 친정어머니, 기타 등등의 주변인들이 즐거워하는 걸 보면 '그래, 당신들이 행복하다니, 난 괜찮아.' 하는 기분이 되는 거지." 어떤 산술 공식으로도 정답을 구할 수 없는 현실의 저와 같은 현상은 단순히 '기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 실체 있는 재화와 권력으로도, 치환될 수 있다. 이제껏 두 아이를 키우며 경제적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가치들을 위해 내가 희생한 경제적 이득들이 숱하게 떠올랐다. 내 아이들은 이해타산에 능하지 못한 어미 덕분에 미래 세대가 지는 부담은 모두 짊어지고 계급적 상승은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내게는(우리 부부에게는) 자녀들의 계급을 상승시킬 투자 여력이 없다. 내게 바람이 있다면 내 자녀들에게 부모 돌봄의 노동까지 가중시키지는 않는 것이다.

    왜 가부장제 체제를 분석해야 하는가?

    가부장제 체제란 "가부장적 권력 구조가 다른 집단권력 구조와 역사적으로 고유한 방식으로 중첩되고 교차하는 체제를 뜻한다."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동안 사회 분열이 극심해졌다. 생물학적 여성도 단일한 젠더 정체성으로 묶이지 않으며 근래에는 노동자 집단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개인과 집단은 다양한 제도에 기반한 복수의 집단 정체성을 띠고 상호작용한다. 그 복잡다단한 협력과 갈등의 동학에서 가부장제 체제는 뚜렷한 부상과 쇠락의 궤적을 그렸고, 최근에는 재부상의 조짐마저 드러내고 있다. 가부장제는 이데올로기와 문화 규범을 형성하므로 집단권력 구조의 쇠락이라는 장기 추이와는 무관하게 변화가 어려울 수 있다. 또한 오늘날 부동산과 금융을 통해 양극화된 경제자산에 대한 통제력은 여전히 젠더화되어 있고 이 자산은 다시 권력을 지속시킨다. 가부장제는 약화되고 변화했지 망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역량에 투자하는 사람들의 권한을 박탈하고 특히 여성에게 불이익을" 안기다는 공통점을 가진 가부장적 제도와 자본주의 제도가 다시 결탁해 특권을 공고히 하려는 길을 차단해야 한다. 교차정치경제학은 약자 집단들이 이러한 불평등의 연쇄를 재생산하는 구조물의 생태를 총체적으로 들여다보고 폭넓은 동맹을 조직하기를 돕는 이론적 도구를 자처한다. 99퍼센트를 위한 페미니즘을 넘어 99퍼센트를 위한 정치경제학이 지속가능한 경제와 사회로의 전환을 위해 절실한 때임을 일깨운다.

    누구를 위한 이론인가?

    이론화의 첫 단계는 경제적 불평등이 지속되는 원인을 규명하는 작업이다. 즉 개인(행위성)과 사회(구조) 중 어느 쪽에 책임이 있는가에 관한 기존 학설의 주장을 뜯어보고 이론과 현실의 불일치점에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한 후대의 연구들을 검토한다. 아무래도 신고전파 경제학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자주 비교되는데, 이 두 학설은 그 지위에 비해 한계가 매우 뚜렷하다. 전통적으로 신고전파 경제학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개별 행위자가 가득한 세상", 즉 개인에 주목하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하나의 유해한 생산량식이 지배하는 세계", 즉 구조에 주목한다. 전자는 시장에서 교환을 통해 효용을 극대화하려는 '합리적 인간'의 이익 추구 행위가 비합리적 차별을 일삼는 고용주를 불리하게 만들어 자연스럽게 도태시킬 거라 낙관한다. 하지만 개별 행위자의 행동을 결정한 '선호'가 제도 구조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후자는 젠더 불평등이 오로지 계급 불평등에서 파생되었다고 설명하기 때문에 다른 제도 구조에 기인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때문에 남성이 남성의 집단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기만 하면 사회주의에서 이탈한 것이라고 매도당한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 이론가로서 두 이론의 기존 통찰을 포용하면서도 구조와 행위성의 상호작용을 보는 시야를 확대하는 이론적 혼성을 받아들인다. 실제로 오늘날 학자들은 전통 이론에 부재하다고 여겼던 기술, 젠더, 생태에 관한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현대자본주의도 단순하지 않다. 북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식민 지배를 경험한 국가의 자본주의가 있으며, 신자유주의 정책 출현 이후로 여성 임금노동자가 증가한 현상 등은 자본주의 동학의 결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에 위치한 전문가-관리자 계급의 등장은 노동자 계급도 계층적으로 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윈주의의 다수준선택설은 개인과 집단의 동학에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행동경제학, 고도로 수학적인 접근법을 사용하는 게임이론과 협상 모델, 기술 변화와 사회 규범의 상호작용 등도 기존 이론을 보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행위성과 구조는 각기 교차적이며 서로 중첩된다. 개인과 사회는 나란히 간다. 이 사이의 인과관계는 양방향으로 작용한다. 개인은 젠더와 연령, 섹슈얼리티, 인종, 민족, 시민권으로 정의된 집단 정체성을 가지며, 고용 형태나 자산 소유라는 범주에 사회적으로 배정된다. 이런 범주 중 일부는 상당한 경제적 결과를 낳는다. 이해관계와 정체성도 나란히 간다. 이와 같은 복잡한 정체성과 교차성은 일찍부터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페미니스트 이론가들로 하여금 현실에 보다 정합적인 이론틀을 개발하도록 이끌었다. 집단 갈등의 복잡성은 교차정치경제학을 추동했다. 교차정치경제학은 '경제적인 것'에 대한 더 큰 그림을 그릴 것을 주문한다. 이런 요구 앞에 우선적으로 재점검되어야 하는 영역 혹은 개념이 재생산이다. 저자는 재생산을 인간 역량의 생산과 유지로 정의하며, "신체뿐만 아니라 체화된 신체적,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역량의 생산"을 뜻하는 '사회적 재생산'과 밀착되어 있다고 본다. 재생산과 가부장적 제도 발전은 연관성이 있다. 이에 관한 초기 연구는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수행했고 지금은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런데도 재생산이 경제 외부에서 일어난다는 남성 중심적 가정이 여전히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유는 거시 경제 성과를 측정하는 오래된 회계 관행 때문이다. 한 국가의 경제성장을 측정하는 대표적 지표인 GDP는 시장에서 판매된 상품과 서비스의 가치만 생산된 것으로 본다. 이 지표에는 가족을 돌보는 무급 노동과 가격표가 붙지 않은 대자연의 생태 서비스 가치는 포함되지 않는다. 저자는 전작에 이어 이 책에서도 경제적 성공을 다르게 정의해야 함을 재차 역설한다. 물론 저자의 주장이 정책적으로 채용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2010년 미국에서 실시된 조사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비시장 노동의 대체 비용의 하한 추정치가 전통적으로 측정된 GDP의 약 44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나왔다. 이 추정치는 아동을 보호 감독하는 데 투입한 시간까지 포함한 것이다. 인간의 역량은 노동력만이 아닐 뿐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있는 활동 전체다. 이러한 잠재력은 "고용주와 동반자, 미래 세대를 포함하여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행복의 원천이자 경제적 자원이다." 따라서 재생산은 사회적으로 조직화된 이전(移轉)에 기반하는 사회적 재생산과 분리될 수 없다.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저자의 정의는 "사회에 소속된 집단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과 자신의 이익을 영속화하는 과정"이다. 재생산 자체도 매우 중요한데 문제는 재생산 비용의 분배다. 기업은 누군가 어마어마한 비용을 투자해 길러낸 노동자를 사용하면서도 그 노동자의 사회적 재생산에 필요한 세금을 회피하려고 사업장 이전을 무기로 삼아 위협하려 든다. 여성의 경우는 일단 돌봄 제공자로 지정되고 나면 평생 저소득과 경력 개발 어려움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경제적 자원을 갖지 못한 여성은 사회적 협상력도 취약해진다. 이런 불이익은 남성이라도 피할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여성이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일찍 승자가 된 사람은 후계자에게 유리한 기회를 물려주게 되고 다음 라운드는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펼쳐진다. 이런 순환은 끝난 적이 없다. 그렇다면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하고 재생산하는 사회적 위계 구조를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 구조 안에서 내린 결정이 모든 사람에게 잠재적으로 유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방향으로 '조정'될 수 있다. 집단은 갈등과 경쟁도 하지만 협동하기도 한다. 분배가 불공평하게 이뤄지는 후자의 상황을 결정하는 것은 행위자의 '대안 지위'다. 대안 지위는 어떤 결정이나 선택에서 물러나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가리키다. 강력한 대안 지위를 가질수록 협상에서 유리하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협상은 역동적인 과정이다. 이런 과정을 매개하는 사회제도가 민주적일수록 그래프는 전자의 형태에 가까워질 것이다. 가부장제 구조는 여성의 대안 지위를 약화시킨다.